의료생활협동조합과 복지국가
진료실에서 바라본 세상 <5>

의료생활협동조합에서 근무하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난 무엇을 위해 내 청춘을 그리 쏟아 부었던가?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의 큰 차이는 없다. 스스로를 더욱더 사민주의자로 인식한다는 점만 뺀다면.

수련 후 13년간 의료생협을 떠나 이젠드림의원을 차린 지 이제 1년. 의료생협에서 바라보던 것과 직접 체감하는 개원가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파랑새는 바로 내 옆에 있다고 했던가. 그렇게 막막하고 한 발 더 내디딜 곳이 없게 느껴졌던 의료생협이 그립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뒤돌아보고 싶지 않던 생협의 주위를 다시 어슬렁거리고 있다. 경계를 넘어 외부에서 서 있을 때 내부가 더 눈에 잘 들어온다는 말처럼 틈이 날 때마다 생협에서의 실수, 아쉬움, 지금이라면 그때보다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들로 이것저것 복기를 해본다. 

인연은 참으로 질기고 길다. 생협을 떠난 지 1년, 현재 나는 친정 인천평화의료생협의 경영위원회, 의료생협 연합회의 법제도 개선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좀 더 다른 눈으로 협동조합운동과 사민주의 정치의 접점을 찾아보려 한다. 서투르고 투박했던 4년 전의 글이지만 초심을 생각하며 다시 들여다본다. 

 

   
 

 

2011년 1월 인천의 의료생활협동조합(이하 의료생협)에서 가정의학과 의사로 근무한 지 10년 만에 안식 월을 갖게 되었다. 우리 의료생협은 5년 이상 근무할 경우 직원들에게 한 달의 안식 월을 준다. 5년째 안식 월을 챙기지 못해 10년째인 올해는 꼭 재충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식 월임에도 2일째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사무실에 나왔다가 한 통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본인을 중구보건소 방문간호사로 밝히고 왕진을 요청한다. 92세 할머니께서 낙상을 하여 와상상태에서 욕창이 생겼단다. 인천 부평구 보건소에서 근무했던 다른 방문간호사에게 의료생협이 방문 진료를 한다고 들었단다. 우리 조합과 중구의 위치는 인천의 끝에서 끝이다. 인접 구에는 가끔 왕진을 나가지만 너무 멀고 진료비를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답이 안 나온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우리 할머니 좀 살려주세요.” 

이런 말을 듣고 차마 안식 월 이야기를 꺼내거나 변명 거릴 찾는 의사는 지금껏 의사 생활 중에 본 적이 없다. 다음 날 오후 우리 조합의 가정간호사와 함께 동인천으로 갔다. 중년의 방문간호사를 따라 도착한 곳은 어두운 반지하의 단칸방, 치아도 하나 없는 비쩍 마른 할머니, 좌측 고관절의 대퇴골 골절로 보이는 다리에서 부종과 출혈반이 확인되고, 어르신은 다리를 가누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게 위를 쳐다본다. 

50대 후반의 지적장애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아들, 물론 이들은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이다. 신체 조직이 까맣게 괴사된 욕창 3부위를 제거하고 수액을 연결했다. 발열이 있는 것을 보니 감염이 의심되며, 식사량도 현저히 줄어있다. 입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인천의료원에 근무하는 외과 전문의인 후배가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다. 그 자리에서 중환자실을 확보해 놓았다는 후배가 환자를 바로 보내라고 한다. 치료하는 도중에 중구 보건소장님 본인이 쓰시던 침대라며 트럭에 싣고 오셨다. 

어르신 댁을 나오며 보건소장님께 지역사회 자원을 잘 연계하는 훌륭한 방문간호사 선생님을 두셨다고 말씀드렸다. 보건소에 계신 의사가 왕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드리고, 그전까지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연락해 달라고 했다. 물론 보건소 왕진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알면서 말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과연 어떤 느낌이 드는가?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스토리? 

아니면 민관 협력의 훌륭한 사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의사로서 나는 무거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주치의 제도로 표현되는 지역사회 중심의 1차 의료체계가 잘 정비된 유럽 선진국이라면 이러한 상황은 그리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시민들의 권리이기도 하고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환자가 중심이 되는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한단 말인가?

내가 일하고 있는 의료생협은 바로 이러한 우리 사회의 현실 속에서 출발했다. 지역사회에서 충족되지 못하는 건강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고 운영하는 그러한 조직이 바로 의료생협이다. 건강과 의료의 영역에서 제기되는 사회적 문제를 기업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을 통해 해결하려는 ‘사회적 기업’이다.

현재 전국적으로 15개의 의료생협이 운영되고 있고, 18,000세대의 조합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 100억의 매출고를 올리고 있다. 의료생협은 의원, 한의원, 치과, 건강검진센터, 가정간호사업소, 재가방문요양센터, 요양시설 등을 통해 지역주민들에게 주치의 사업을 전개하고 있고, 다양한 건강소모임과 환자모임을 통해 건강증진과 유지 및 재활사업을 벌이고 있다. 

왕진과 가정간호 등의 찾아가는 서비스는 물론이고, 거동불편 장애노인을 돌보는 주간 돌봄센터(day-care center)도 운영하고 있다. 또 지역별로 대의원 조직을 통해 조합과 소통하고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한 참여를 실현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 건강부문의 민주주의를 훈련하고 실천하는 장인 셈이다. 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이주 여성들, 가정폭력 피해자, 철거민, 장애인, 아동 등의 의료취약계층에게 다양한 주치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주치의 제도가 중심이 되는 1차 의료의 확립은 국가보건의료체계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근간이 되는 토대이다. 1차 의료가 활성화된 국가의 보건의료비 지출은 그렇지 않은 국가들에 비해 적고, 국민들의 건강 수준은 유의미하게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료가 시장에 맡겨져 있는 부자나라 미국과 주치의 제도와 무상의료가 실현되고 있는 가난한 나라 쿠바의 경우, 영아사망률과 기대수명에서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국가와 시장이 있는데, 왜 의료생협이라는 사회적 경제영역이 필요한가? 한국에서 복지 부분에 대한 국가의 체계적 개입이 시작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의료영역도 마찬가지로 자체적인 근대화의 동력이 형성되기 전에 해방과 미 군정, 한국전쟁을 거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식 의료시스템이 그대로 이식되었고, 의료영역을 치료중심의 민간 부분에 일방적으로 맡겨 놓은 채 건강권 확보라는 국가의 기본적 책무를 소홀히 해왔다. 

급증하는 사회적 불안과 역동적 민주화 과정, 국가의 개량주의적 정책의 혼합물로 공적 의료보험제도가 생겨났고, 조합주의 의료보험이 통합되어 국민건강보험이 창설된 지 10년이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건강보험은 국민들의 치료비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해주지 못하는 반쪽짜리 의료보장에 불과한 상황이다. 우리는 국가와 정치를 통해 건강과 의료에 대해 최대한 개입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토록 복지국가를 열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경제영역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율이 늘고 있는 현대의 복지국가들과 한국의 상황은 많은 차이가 있다. 서구 유럽의 경우 자본주의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축적된 물질적 성과를 토대로 사회연대에 기초한 복지국가를 건설하였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의 신자유주의 광풍을 거치면서 복지지출로 인한 재정 부담과 비효율을 개선하기 위해 서구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사회서비스의 공급주체를 다변화하기 시작했고, 빈곤과 실업으로 야기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사회통합과 지역사회개발을 위해 국가와 시장의 한계를 보완하는 주체로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경제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사회적 경제영역을 담당하는 부서가 행정부 내에 있으며, 그 역할을 증대시키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이 취약하고 유럽 복지국가들에 비해 복지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경제는 단지 정부의 일자리 창출정책의 목표 달성을 위한 협소한 의미로 축소되고 있다. 그리고 사회서비스 제공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하는 공공의 역할을 시장과 사회적 기업에 전가하려 하고 있다. 국가와 시장에 의해 제공되는 ‘보호된 시장’이 필요한 걸음마 단계의 사회적 기업들마저 시장의 매서운 찬바람으로 내몰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사회는 근대적 과제와 탈근대적 과제의 해결이 동시에 요구되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라는 사회경제적 평등과 복지국가 건설이 근대적 과제라 본다면 국가와 시장영역을 보완해 주는 시민사회의 사회적 경제영역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이라는 저작을 통해 자본주의 이전의 시장은 사회구성원들의 물질적 필요를 해결할 목적으로 사회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논증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접어들면서 노동력(인간)과 원료(환경), 화폐(유통)이라는 시장의 요소들이 완전히 상품화되어 자기 조절적인 시장경제가 가능하게 되리라는 유토피아에 빠지게 되었고, 그것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려는 운동과 불가피한 마찰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운동과 불안의 본질이라고 설파했다. 최소한의 사회권을 보장해주는 국가, 재화와 서비스를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시장이 상호부조와 호혜를 기반으로 하는 시민사회영역의 민주주의에 의해 통제되고 제어되는 시스템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내용이다.

전통적인 사회적 기업인 협동조합을 비롯해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의 주체들은 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적 요구들이 더 보편적으로 실현될 수 있기 위해서는 복지국가의 토대와 지원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 복지국가에 의해 사회권이 보장되는 곳에서 그것을 기반으로 ‘대안 사회의 건설’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즉, 미시적인(micro) 해결은 거시적인(macro) 변화와 맥을 같이 하지 않는다면 제한적인 영향력과 자기만족만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게 된다.

복지국가 건설을 염원하는 주체들은 사회적 경제영역에 주목해야 한다. 지역사회에서 자율과 자치, 그리고 협동을 통해 민주주의 의식을 성장시켜온 시민들은 복지국가 건설의 주요한 기반이자 동맹세력이 될 것이다. 

또, 거시적 수준의 제도 변화만으로 인간이 좋은 방향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지역사회 단위에서 경험하고 실행할 시민들이 없는 민주주의는 얼마나 공허한가. 이러한 민주주의는 단지 절차적 과정에 다름없는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의 주체들이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모든 국민에게 주치의를! 모든 병원비를 건강보험 하나로! 이것은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실현해야 할 핵심적인 의료 부분의 과제들이다. “깨어있고 조직된” 지역사회 풀뿌리 시민들의 힘으로 말이다. 이 과제들이 현실화될 미래를 생각하며 가슴 설레는 나에게 오늘의 왕진 가방은 결코 무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