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애에서 연대와 복지국가로
형제애, 그 발전물인 연대 그리고 그 실현인 복지국가

이성재(충북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우리나라의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여기서 공화국이란 과연 무엇을 추구하는 정치체제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1789년 혁명을 통해 들어선 프랑스 제1공화국이 자유, 평등, 형제애를 기본 정신으로 내세웠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세 정신 가운데 자유와 평등은 종종 상충하면서 우파와 좌파의 논리로 각각 발전하였다. 그렇다면 형제애는 어떤 식으로 역사 속에서 나타났는가?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형제애는 이후 연대 개념으로 확장되어 복지국가를 세우는 데 초석의 역할을 한, 매우 귀중한 정신이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권은 복지담론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그동안 선성장 후분배 구호에 가려 복지담론이 큰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는 점에서 다소 늦었지만 이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현재의 복지논쟁이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그 균형추인 형제애, 그 발전물인 연대의 개념 그리고 그 실현인 복지국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형제애의 전통

프랑스에서 형제애의 전통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에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맹인 형제회의 규약은 공동체 내부에서의 연대와 상호부조가 어떤 방식으로 실행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는 맹인 안내인의 공동 이용, 병들었을 때 상호 방문 그리고 공동체가 모금한 자선금을 나누는 방식 등이 상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형제회를 통해서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삶을 안정적으로 꾸려나가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경제가 번성하고 여유가 생기는 시대에 형제애는 주로 빈민에 대한 자선의 형태로 나타났다.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도 자선(caritas)을 강조했다. 그가 말한 자선은 기도를 하고 교회에 자주 나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semblables) 자신의 수족처럼 여기는 자선”이었다. 그는 '교본'(Enchiridion)에서 기독교적 사랑을 타인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구원의 손길을 뻗고, 빗나간 사람을 부드럽게 타일러 돌아오게 하고, 분별없는 사람을 가르치고, 타락한 사람을 다시 일으키고,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원조하고, 궁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인은 궁핍한 사람과 형제애를 느끼면서 빈민을 도와야 했다. 또한 그는 재산을 탕진하고 낭비하는 삶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율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너의 수족과 같은 사람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이를 악물고 있는데 너는 배불리 먹고만 있을 것인가? 너의 형제는 추위로 떨고 있는데, 너의 집에는 먼지가 묻고 좀과 곰팡이가 슨 옷이 구석에 처박혀 있지는 않은가?” 기독교의 사랑에 따르면, 부유한 사람의 재산은 공공 재산이고 부유한 사람은 단지 수탁자에 불과했다. 소유를 금지하고 빈곤하게 살아야하는 의무가 단지 성직자에게만 해당된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러한 원칙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소빙기의 여파로 작황이 좋지 않던 17세기에 종교적 형제회의 활동이 활발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형제회의 구성원들은 인위적이긴 했지만 가족이라는 개념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사회적 위계질서의 틀에서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려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위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서로가 형제라는 개념을 공유함으로써 17세기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역사가 로베르트 쥐테(Robert Jutte)는 이러한 형제회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여러 조직들 가운데 육체적 고통을 덜어주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형제회였다. 종교적 차원에서 구성원들은 죽은 자의 매장과 미사 시에 서로를 돕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형제회는 성직자, 귀족,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상호 부조의 정신은 우리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유언장에는 이 정신이 형제회에 대한 유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 파리의 유언장을 보면 16세기 이후 형제회에 대한 언급은 계속 증가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1510~30년 사이에 8~9퍼센트에 머물던 언급 회수는 16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10퍼센트를 넘어섰고 1611~30년에는 30퍼센트에 육박한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회수는 다시 9퍼센트로 떨어지는데 이는 1656년의 종합병원 창설과 같이 부조 정책에 국가가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 프랑스 전 지역에서 전개된 병원 설립에는 형제회의 구성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빈곤의 규모가 커지자 소규모의 공동체라는 틀을 벗어나 전 사회적으로 자신의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형제애 개념의 확장: 연대

프랑스 혁명과 함께 들어선 제1공화정 초기에 형제애의 정신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여전히 강고한 계급 사회였던 프랑스에서 계급적 차별을 무시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혁명기의 형제애라는 개념이 적에 대한 탄압이나 사회적 불평등을 무마하기 위한 화해의 의미로 사용된 것도 그 이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형제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 말은 지속적으로 그 범위를 확장시켜 나갔다. 단순히 가족이나 소규모 공동체 내부로 이 말을 한정시키는 것은 당시의 사회 변화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는 ‘연대’라는 말의 변화에서도 잘 나타났다. 라틴어의 솔리두스(solidus)에서 유래하는 연대는 원래 ‘단단한’, ‘고정된’, ‘지속적인’이라는 뜻을 지니며, 로마 채권법에서는 가족이나 공동체의 ‘연대 채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시기에 이미 공공 부조의 국가 기획이 시도되면서부터 그 의미는 법적인 채무 연대의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19세기를 통해 ‘연대’는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단결과 관련하여 주로 사용되었으며, 점차 모든 사회 구성원을 고려한 정의 사회의 실현이라는 도덕적 의미까지 지니게 된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피에르 로장발롱(Pierre Rosanvallon)은 프랑스어에 연대와 복지 국가라는 표현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제2제정 하에서였다고 말한다. 당시 이 표현은 역설적으로 국가 기능의 성장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던 자유주의자들이 만들었다. 하지만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공화주의자들이었다. 에를 들어 제2제정에 참여한 공화주의 의원 에밀 로랑(Emile Laurent)은 1860년에 한 결사금지법안 조사위원회의 보고에서 이 개념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는 노동자의 단결을 금지한 1791년의 르 샤플리에(Le Chapelier)법이 극단적인 개인적 자유주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비판한 후 그 대안으로 일종의 섭리 국가(Etat-providence)를 주장했다. 이는 안전을 책임지는 보호국가에서 보장을 상징하는 국가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후 ‘연대’의 개념은 제3공화정 하에서 사회보장의 도입을 추진했던 사회공화파에 의해 주개념으로 사용되었다. 19세기말에 이르면 ‘연대’ 개념은 형제애를 대체할 정도로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프랑스의 산업화와 이로 인한 빈곤의 대량화 역시 ‘연대’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과거 개인적 불운이나 게으름 때문에 생긴 빈곤은 가족이나 소규모 공동체의 도움으로 해결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나 커졌다. 그리고 빈곤은 이제 부지런한 개인들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전 방위적인 사회구조의 문제로 변모하고 말았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는 형제애의 개념을 연대의 개념으로 확대, 전환시킨 사회학의 출현을 가져온다.

‘연대’의 개념을 현대 산업사회의 맥락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그 의미를 확장시킨 대표적인 학자로 우리는 에밀 뒤르켕(Emile Durkheim)을 들 수 있다. 뒤르켕은 ‘연대’(solidarité)를 사회구성원간의 합의와 상호의존성 그리고 위험에 대한 공동 부담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는 이 연대를 '기계적 연대'와 '유기적 연대'로 나누어 설명했다. 우선 기계적 연대란 가족이나 부족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연대로서 구성원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공통의 대인관계나 가치 그리고 신념이 존재할 때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현대사회보다 원시사회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기계적 연대의 실현 가능성은 높아진다. 반면 유기적 연대는 사회적 분화가 급격하게 발생하는 현대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복잡한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상이하게 평가되는 상이한 역할을 수행할 필요성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기능의 상이성에 근거한 연대가 유기적 연대이다. 유기적 연대에서는 도덕적으로 보편 윤리에 대한 감성과 개인들 사이의 자발적 상호의존성이 더욱 높아지며, 이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결속은 기계적 연대보다 훨씬 높아진다.

뒤르켕은 개인적 이해관계의 자유로운 활동이 사회적 연대의 토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분업이 고도로 발달된 복잡한 사회일지라도 그 사회가 원자들의 단순한 집합체는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사회가 ‘호혜’와 ‘상호성’에 기반을 둔, 우리가 결코 짐을 벗을 수 없는 상호 책무와 연대의 복합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이런 책무와 연대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의무를 부여받은 것이 바로 국가라고 생각했다. 즉 국가야말로 “사회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유일한 특징을 갖는 사회체의 총체”이며, 일반의지의 결집체로서 일반이익을 실현하는 도구, 국민주권의 실현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연대를 실현하는 기관이 결국은 국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연대’의 이상은 위기에 직면한 사회를 구하기 위해 국가의 역할을 재규정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복지국가와 사회권

이러한 사상의 변화 속에서 프랑스는 19세기 말부터 연대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복지 제도들을 도입한다.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사회보장’의 성격을 가진 ‘산업재해에 관한 법률’이 1898년 4월 입법화되었다. 이후 1905년 극빈노인과 장애인의 부조권, 그리고 1910년 노동자와 농민의 연금에 관한 법률이 입법화되었고, 1914년 실업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는 전국적인 망이 확립되고 실업보험제도가 도입되었다. 

본격적인 복지정책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전후부흥이라는 환경변동을 배경으로, 구체적으로는 다양한 정치세력 간의 타협을 통해 도입되었다. 1930년에 출산, 질병, 장애, 노령, 사망을 포괄하는 사회보장법이 도입되었는데 노사정 간의 최초의 협조체제(코포라티즘)의 성과라고 볼 수 있는 법이다. 이후 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의 복지체제는 전쟁 전의 기본적 특징을 계승하여 직능별 연대를 기반으로 하면서 국가에 의한 재정 보완과 최소한의 공적부조, 가족 수당을 더한 형태로 ‘국민적 연대’ 가치를 구현하는 길로 나아갔다. 복지국가에서의 연대는 개인들의 삶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러한 상태에서 연대가 부재하게 되면 결국 대부분의 개인들이 위험에 노출되고 불행하게 된다는 점, 따라서 개인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복지국가를 통한 개인의 생활보장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주의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개인들은 그러한 행복한 생활보장을 요구할 적극적 권리를 가진다.이 권리를 '사회권'(droit social)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영국의 사회학자 마샬(T. H. Marshall)에 따르면 ‘사회권은 일정정도의 경제적 복지와 보장에 대한 권리로부터 사회의 지배적인 기준에서 보았을 때 문명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을 누리고 사회적 유산에 충분히 참여할 권리에 이르기까지의 제반 권리로 구성된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이 있다. 프랑스에서 유학당시 나는 지하철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한 중년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많은 외국인 걸인들이 무릎을 꿇고 굴욕적으로 구걸을 하는 것과 달리 현재 프랑스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 자신이 실업 상태에 있는 것이 이 사회와 정부 탓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누구나가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가져야 할 사회권을 이 정부가 빼앗아갔다고 주장했다. 박수를 치는 시민들이 상당수 있었고 모자에는 동전이 차기 시작했다.

현대의 어떤 국가든 일정한 발전 수준에 이른 국가라면 개인들의 사회권을 인정하고 이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나름대로의 정책들을 시행하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사회구성원 상호간의 책임이라는 오랜 전통이 여전히 살아있다. 연대의 도덕적 측면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종종 모범 사례인 것처럼 언론에 등장하는 미국의 기부 문화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매우 훌륭하고 권장할만한 것이지만 이것이 국가 차원에서의 미약한 복지체제를 대체할 수는 없다. 몇몇 고액소득자들이 이따금 기부하는 것만으로는 연속적이고 체계적인 복지정책을 실시하기 곤란하며, 자선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시혜를 받는 것이지 그 자신의 권리 행사가 아닌 것이 된다. 일자리, 교육, 주거, 노후, 의료는 한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이다. 따라서 국가의 복지 역할은 최소한에 그치고 부족한 부분은 기부로 해결하려는 미국과 같은 선별적 복지국가는 우리가 따라야 할 모델이 될 수는 없다. 결국 복지 혜택을 사회 전체로 확장시키려는 보편적 복지국가야 말로 공화국의 이념을 제대로 실현하고 사회권을 온전히 실현시킬 수 있는 제도인 것이다.